반란자1

백선엽야전사령부(백야사)는 1951년 11월 후방의 빨치산 토벌을 위해 만들어졌다.
작전명은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er)이었다. 작전은 3만여 병력이 지리산을 포위하고, 정상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 들어가면서 산간마을의 가옥과 시설을 모두 소각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경남 산청•거창 등 민간인 희생사건’, 참고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에게 미8군사령관 맥스웰 테일러 중장이 훈공장을 수여한 모습
1953.3.26. NARA 소장

2006년 조재현 씨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제출한 진실규명 신청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경남 산청, 거창 등 민간인 희생사건(004)」, 2011, 국가기록원 제공, 관리번호 DA0797986

1950년 가을, 경남 산청군 삼장면 대하리 보안마을에 살던 조재현 씨(당시 9살) 일가족은 인민군이 퇴각하며 국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산으로 피했다. 국군이 오면 마을사람들을 다 죽인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1년여의 기간 동안 산에서 피란 생활을 하던 중 1951년 겨울 백야사의 동계토벌작전이 시작됐다. 산으로 밀려오는 토벌군을 피해 가족들은 흩어져 도망쳤으나 할아버지 조주환은 군인에게 잡혀 몽둥이로 맞아 온몸이 다 부서져 사망했다. 옆에서 두 살배기 아이(조인현)을 품에 안고 있던 작은 숙모 강월선은 남편이 어디 갔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총살당했다. 안고 있던 아이도 함께 죽었다.
조재현 씨를 포함해 살아남은 가족들은 광주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수용소의 열악한 처우로 할머니 권선갑과 숙모 김봉순 그리고 6살의 조기현은 사망했다. 고아원으로 보내졌던 조재현 씨는 광주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가족이 석방될 때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집은 모두 불타 없어진 상태였다.

2006년 조재현 씨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제출한 진실규명 신청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경남 산청, 거창 등 민간인 희생사건(004)」, 2011, 국가기록원 제공, 관리번호 DA0797986

2006년 조재현 씨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제출한 진실규명 신청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경남 산청, 거창 등 민간인 희생사건(004)」, 2011, 국가기록원 제공, 관리번호 DA0797986

백야사의 빨치산 토벌작전과 조재현 씨 가족의 죽음
정다우리(촬영 및 편집),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기획),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