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피란의 여정

‘자유 피란민’
살기 위해 떠난 사람들을 국가는 ‘자유 피란민’이라고 불렀다. ‘자유 피란민’이란 이름에는, 공산주의 체제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적극적으로 선택했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국가는 그들을 치켜세웠다.
피란의 과정에서 그들에게 과연 ‘자유’란 무엇이었을까. 과연 그들이 만난 ‘자유’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서울에서 남쪽으로 피란을 떠나는 수천 명의 사람들
1951.1.5. NARA 소장, 전갑생 제공

서울에서 남쪽으로 피란을 떠나는 수천 명의 사람들
1951.1.5. NARA 소장, 전갑생 제공
서울에서 남쪽으로 피란을 떠나는 수천 명의 사람들
1951.1.5. NARA 소장, 전갑생 제공
삐라 1158 (앞)
NARA 소장, 이임하 제공

대한민국에선 모든 백성들이 자유롭게 산다.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수 있고, 자기네들이 원하는 정부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노예생활이 전염병 퍼지듯 늘어가고 있다. 공산정부가 명령하는 대로 일을 해야하고, 총칼로 백성을 다스리고 있다.

삐라 1158 (뒤)
NARA 소장, 이임하 제공
대한민국에서는 모든 백성들이 자유롭게 산다. 농민은 자기가 거둔 곡식을 가질 수 있고, 학생들은 자유로운 배움의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노예생활이 전염병 퍼지듯 늘어가고 있다. 공산 정부는 농민의 곡식을 빼앗아가고, 학생들을 혁명과 미움과 전쟁의 정신병자로 만들고 있다.
삐라 8164
NARA 소장, 이임하 제공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심리전의 일환으로 삐라를 사용했다. 삐라에서 남한은 ‘자유롭고 풍족한 별천지’로 묘사되는 반면, 북한은 ‘공산주의의 빈곤한 노예생활’로 묘사된다.
그러나 피란민의 피란 과정은 ‘자유롭고 풍족한 별천지’와는 전혀 동떨어진 생활이었다.

살기 위해 떠나다
한국전쟁 당시 대규모 피란이 두 차례 있었다. 전쟁 발발 직후의 1차 피란과 1950년 12월부터 1951년 1월에 걸친 2차 피란. 전쟁은 워낙 갑작스러웠으므로, 1차 피란 당시엔 미처 떠나지 못하고 북한의 점령하에 놓인 사람들이 많았다. 2차 피란 때는 군 당국이 나서서 피란을 조직했다.
특히,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후 남한 정부가 북한 점령하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가한 보복을 목격한 사람들은 더욱 필사적으로 피란을 떠났다. 피란 행렬에는 월남한 북한 사람도 있었다. 월남의 이유 중에는 미군 폭격으로 인한 북한 지역의 초토화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피란길에 올랐지만, 결국 그들이 피란을 떠난 궁극적인 이유는 살기 위해서였다.

얼어붙은 한강 위를 걸어서 건너는 피란민들의 모습
1951.1. NARA 소장, 전갑생 제공

공산군의 도하를 막기 위해 폭파되는 한강의 가설 부교
1951.1.4 NARA 소장, 전갑생 제공

폭파가 완료된 한강의 가설 부교
1951.1.4 NARA 소장, 전갑생 제공

한강 도하 금지를 알리는 삐라
1951.1. NARA 소장, 전갑생 제공

공산군이 남하하면서, 군 당국은 서울 이남으로의 후퇴를 결정하고 1950년 12월부터 2차 피란을 기획했다. 서울시민의 피란은 군사작전을 방해하지 않도록 통제되었다. 당시 한강에 가설된 부교는 오직 군사적 목적, 즉 병력•보급물자•장비의 이동을 위해서만 이용되었다. 피란민이 허용되지 않은 곳에 접근할 경우 발포해도 된다는 승인이 떨어졌다. 미처 피란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서울에 그대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피란민의 이동을 막아 적 오열의 침투를 막기 위해서라는 군사적 목적 때문이었다.*

*강성현, 「한국전쟁기 유엔군의 파난민 인식과 정책」, 수선사학회 『史林 33호』, 2009, 101-107p

모든 피란민에 대한 소개疏開 및 통제된 이동
NARA 소장, 전갑생 제공

1부:
소개 절차는 즉시 시행되어야 하며, 전투지역과 후방의 모든 피란민의 흐름 및 이동을 관할하는 모든 부대에 의해 준수되어야 한다. 어떤 시간대의 어떤 피란민도 전선을 통과할 수 없다. 모든 한국인들의 집단 이동은 즉시 중단된다. 미8군 사령관의 직접적인 명령이나 사단 지휘관의 명령 없이, 한국인 스스로 대피 지역을 판단할 수 없다. 각 사단에는 연락을 위한 세 명의 한국 경찰이 배치되어 어느 지역이든,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데 방해가 되는 민간인에 대한 소개를 도울 것이다.

2부: 비워져야 하는 구역에 대한 소개 절차
사단장은 한국 경찰에게 대피 지역 및 구역, 모든 대피자의 이동 경로, 지역이 소개되어야 할 시간 등을 통보한다. 한국 경찰은 예정된 집결지까지 예정된 경로로 이동할 피란민 무리에게 위 사항을 알리고, 해당 지역에서 통제된 지점으로 이동하도록 유인해 즉시 소개를 완료한다. 이들 피란민을 위한 식량과 물, 구호 물품은 사회부 차관이 한국 경찰을 통해 제공할 것이다. 모든 피란민들은 일출에서 일몰까지 예정된 집결지로 이동해야 한다. 이는 경찰청과 복지국 대표들이 직접 지휘하는 통제된 이동이 될 것이다.

3부: 야간의 민간인 소개 절차
야간 이후 전투지역이나 후방지역에서의 민간인 개인 혹은 집단의 움직임은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동일한 명령을 받은 한국 경찰은 이 지시를 엄격히 집행한다.

4부:
이 지침에 설명된 소개 절차를 수행하기 위한 전단을 준비해 전선의 전방 및 후방 모든 영역에 투하해 이 정보를 효과적으로 배포한다. 또한 한국 경찰은 이 정보를 라디오, 전보, 언론을 통해 모든 한국 민간인에게 전파한다.

대전에서 피란 나온 남한 여성을 돕고 있는 미군
1950.7.21. NARA 소장, 강성현 제공

사진을 찍은 미군 사진병은 ‘남한 여성을 돕고 있는 미군’이라고 캡션을 달았다.

아이를 업은 여성이 짐보따리를 풀어 헤치고 있다. 이는 미군의 요청 때문인 것으로 보이며, 뒤쪽에서는 한국군이 남성의 몸을 수색하고 있다.

의정부 피란민 검문소에서 지뢰 탐지기로 피란민의 짐 속에 무기가 있는지 검사하는 빌리 병장
1951.1.2. NARA 소장
경상남도 함안에서 한 여성의 피란민 증명서를 검사하는 한국 헌병
1950.8.23. NARA 소장
‘순수’ 피란민
피란민은 퇴각하는 군대를 쫓아 이동하거나, 군 당국이 정해준 피란 경로를 따라서 이동했다. 길 위에서 만난 아군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전쟁은 군대가 보호해야 할 민간인을 변장한 적군으로 의심하게끔 만들었다. 자기증명의 책임은 피란민에게 떠넘겨졌다. 피란민은 어떻게든 스스로 적이 아닌 ‘순수’한 ‘양민’임을 증명해야 했다.
정부는 전쟁이 발발한 지 한 달 가량이 지난 7월 20일에 첫 피란민 대책을 발표했다. 피란민 수용소를 설치하고, 양곡을 지급하며, 피란민 이동을 지원하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지원은 피란민 증명서를 발급받은 사람에 한해 제공되었다. 피란민 증명서는 오로지 ‘사상’이 ‘온건’한 피란민에 한하여 발급되었다. 특히 사상불온자의 피란민 수용소 출입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통첩사항: 사회•농림•국방•내무•교통•보건부장관으로부터 충남북•전남북•경남북각지사에게, 피란민분산에 관한 건」
1950.7.20. 《관보》 제384호. 국가기록원 소장

*문서의 좌측 하단이 피란민 증명서의 양식이다.
*아래는 사회부관계, 국방부•내무부관계 내용을 번역한 것이다.

一, 사회부관계
1. 피란민 수용소 설치 ― 각 도는 철도연선기타필요주소에 할당된 피란민을 완전히 수용할 수 있도록 피란민 수용소를 화급설치할 것
2. 피란민 증명서교부 ― 연고, 지인이 전무하고 사상이 온건한 피란민에 한하여 피란민 증명서를 교부할 것(양식별지와 여함)
3. 인솔 ― 대전서부터 목적지까지 인솔할 것
4. 수용 ― 피란민 증명서 소지자를 원칙으로 하여 수용하되 특히 사상온건여부를 항상 심사감시할 것
5. 급식 ― 일인 일일당 이합식 급식할 것
6. 경리 ― 본 예산령달 항목 이외의 지출을 절대 금하여 최소한도로 절약적정을 기할 것

三, 국방부•내무부관계
1. 피란민 신분조사급 피란민 증명서 교부협력 ― 불순분자를 제외하기 위하여 대전시에 드러오는 또는 대전수용소에 수용된 피란민의 신분을 세밀히 조사하여 사상온건한 자에 한하여 피란민 증명서 교부에 협력할 것
2. 인솔 ― 대전서부터 피란민의 승차, 수송 도중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목적지까지 인솔할 것
3. 경비 ― 대전수용소에 수용된 또는 각 도 피란민 수용소에 수용된 피란민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상불온자의 개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피란민수용소에 상시 주재 경비할 것

피란민을 감시하는 미 제1기병사단 헤론 상병과 챈들러 상병
1951.8.20. NARA 소장

당시 유엔군에게 있어 ‘흰 옷 입은 사람’은 일차적으로 적이라 간주되었다.
전쟁 초기 유엔군은 후방을 공격당하는 경우가 잦았다.
이는 북한군의 게릴라 전술 때문이었지만, 유엔군은 전선의 후방으로 들여보낸 사람들, 즉 ‘흰 옷 입은 피난민’들이 사실은 민간인으로 위장한 적이며 그들에 의해서 후방 공격이 이뤄졌다고 생각했다.

작전 중 체포된 한국 주민을 심문하는 영국 해병대원
1951.5.17. NARA 소장

미군이 촬영한 「미 제2보병사단 헌병에게 조사를 받는 피란민 가족」 영상

본 영상에서는 남편이자 아버지로 보이는 남성이 전쟁포로로 분류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과 적군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았으며 피란민이 언제라도 적으로 취급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영상에서 미군은 피란민 가족에게 DDT를 살포하는데, 이는 피란민이 전염병을 옮길 수 있는 사람들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에서 배급받은 쌀로 지은 밥을 먹고 있는 피란민 가족
1951.9.11. NARA 소장
허락 받은 생존
피란민의 자기증명은 생존의 문제이기도 했다. 피란민의 삶은 궁핍했다. 타지에서 먹을 것을 구하고, 추위를 피해 몸을 누일 곳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피란민 수용소는 한정적이지만 안정적으로 음식을 얻고, 가재도구를 풀어 살림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오로지 허락된 피란민만이 피란민 수용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경상북도 대구, 피란민이 사용하고 있는 과밀된 주거 공간의 모습
1952.1.11. NARA 소장
원주 인근, 길가에서 동사한 한국인 가족을 지나치는 미 제2보병사단 9연대 부대원들
1951.1.17. NARA 소장

소위 1.4후퇴로 불리는 2차 피란은 겨울이었기에, 추위를 피하지 못하고 숨진 피란민이 많았다.

미군 사진병이 찍은 사진은 모두 상부의 검열을 받은 뒤 공개되었다. 공개가 적절치 않다고 판단되는 경우, 사진 상단에 보이는 것처럼 RESTRICTED라는 도장을 받았다.
RESTRICTED 위에 그어진 빨간 선은 금지 기간이 지나 다시 공개가 허락되었음을 뜻한다.

피란민 수용소로 들어가기 전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피란민들
1951.8.26. NARA 소장, 전갑생 제공

마치 현재의 유치장 같은 곳에 피란민들이 수감되어 있다.
사진 속 사람들을 보면 피란민 심문, 즉 사상온건 여부 심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강원도 인제군 진동리에서 생포된 포로를 심문하는 한국군 장교
1950.10.18. NARA 소장
북한군 정규군으로 생포된 포로들이다. 대부분 무릎을 꿇고 있다.
젊은 한국 남성을 심문하는 캐나다 제25보병여단 스미스 상병
1951.10.7. NARA 소장

심문은 피란민 집결소에서 진행되었다. 스미스 상병 우측은 한국군 통역관이다.

이 사진 하단에도 RESTRICTED 표시가 되어 있다.

사단 본부에서 피란민을 심문하는 미 제2보병사단 쿤소키 상병
1951.2.19. NARA 소장
주한유엔민간원조사령부 캠프에서 피란민을 심문하는 한국인 통역관
1951.11.20. NARA 소장
계급화된 피란
전쟁의 지도자들은 피란을 철저하게 군사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피란민은 생존과 안전을 보장받아야 할 국민이 아니라, 군사작전의 방해요소이자 통제와 관리의 대상이었다.
또한 피란은 계급화되었다. 대통령, 고위공무원 등 상류층만이 가장 안전한 지역이었던 낙동강 이남에 머무를 수 있었다. 이외의 수많은 피란민은 안전지역에 들어가는 것이 거부되었고, 심지어 안전지역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유엔군이 지정한 피란민의 이동로 및 접근금지 구역
NARA 소장, 강성현·전갑생 제공

⇨ 파란선: 주보급로는 주 도로로서 군인과 군 보급차량만 이용할 수 있었으며, 피란민의 접근은 제한되었다.

⇨ 초록선: 허용된 피란길은 주로 샛길이었으며, 이 당시 피란민들은 대부분 충청, 전라 부분으로 이동하도록 통제되었다.

⇨ 빨간선/갈색선: 전쟁 시작부터 종전까지 경상도 지역은 가장 안전한 구역이었으나, 이 지역에는 (고위)공무원이나 군경, 그리고 상류층만이 접근할 수 있었다.

1951.1.20. 제20대 국회 제10회 제11차 국회본회의 중 박승하 의원의 발언

“어제 저녁에 부산시의 이쪽 전차길을 중심으로 해 가지고서 대개가 여기가 중심이 되어 있는 모양인데 일반 피난민이 혹은 여관에, 혹은 어떤 창고, 여기에 많이 수용이 되어 가지고 있는데 그분들에게 아무 예고도 없이 어제 8시가 지나 가지고서 통행금지시간이 지나자 경찰이 여기 향토방위대인가 그 사람들을 동원시켜 가지고서 일제이 전부 피난민을 이주시킨다고 해서 추럭 혹은 승용차를 가지고 와서 총칼을 갖다가 대고 타라고 하니까 일반 피난민은 그 총칼이 무서워서 타지 않을래야 타지 않을 수 없었든 모양입니다. 그래서 물론 피난민 중에 금침(衾寢)이나 혹은 돈이나 그 얼마 가지고 오지 못한 그거나마 죄 버리고 가족과 가족 사이에 서로 간 연락도 없이 그 차에 타 가지고 전부 갔다고 하는 그런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그 타는 사람들이 전부가 눈물을 먹음고 울며불며 타라고 하니까 타지 않을 수가 없어서 그 차를 타고서 갔다고 하는데 그 말을 들으면 어제밤 11시까지 전부 한데 집합해 가지고서 오늘 아침에 그 시간을 확실히 알 수가 없읍니다마는, 오늘 아침 어떠한 배로다가 어떠한 곳에 이송한다고 하는 이런 말을 듣고 있읍니다.”

맥아더를 만나기 위해 수원비행장에 도착한 이승만
1950.6.29. NARA 소장
전쟁 발발 후 6월 27일 새벽 이승만 대통령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먼저 대전으로 피신했다. 이후 6월 29일 맥아더 사령관이 왔다는 소식에 주한미대사 무초와 함께 수원비행장에 방문했다.
(왼쪽부터) 전진부대사령관 존 처치 준장, 주한미국대사관 에버럿 드럼라이트 참사관, 대통령 이승만. 담소를 나누며 웃고 있다.
불가능한 피란
피란민들은 전쟁을 피해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났다. 하지만 그들이 길 위에서 만난 것은 생존과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또 다른 전쟁의 현장이었다. 어떤 피란의 종착지는 죽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