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하이너는 그가 공군 수훈 십자훈장을 받게 해 준 임무를 ‘대량학살’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달려가는 군인과, 내가 곧 죽이게 될 민간인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냥 공중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우리의 비행경로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였습니다.” *
군사적 목표
폭격이 지상에서의 전투와 다른 점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분리가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백병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서로를 마주 보지만, 폭격의 수행자는 공격의 대상을 아주 멀리서 목격하거나, 아예 보지 못한다. 공격의 대상은 그저 ‘군사적 목표’로만 이해된다.
전략폭격, 집중폭격, 정밀폭격, 맹목폭격……모든 폭격은 ‘군사적 목표’에 실시되었다. ‘군사적 목표’라는 이름표가 붙은 곳이면, 어디든 폭격의 대상이 되었다. ‘군사적 목표’는 공업단지, 군사기지, 철도와 같은 실제 군사용 시설뿐 아니라 도심과 마을, 거기 살고 있는 사람까지 포함했다.
좌표상의 폭격 지역은 현재 충남 금산군이며, 사진 촬영 당시 전선의 후방에 위치했다.
한국전쟁 당시 마을이나 도시는 북한군 혹은 북한군 보급품 은신처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모두 ‘군사적 목표’로 인식되었다.
사진 상의 낙하산에는 모두 폭탄이 매달려 있다.
당시 유엔군은 삐라도 낙하산에 매달아 투하했는데, 이리(현 익산)역 폭격의 경우 사람들이 떨어지는 낙하산을 삐라를 뿌리는 것으로 착각해 미처 피하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었다.
*김태우, 『폭격-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255-257p
B-29 98대는 “3084발의 225킬로그램 파괴폭탄과 150개의 450킬로그램 파괴폭탄”을 해당 지역에 투하했다. 하지만 폭격이 이뤄진 지역에선 이미 북한군이 다른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상규명과정에서 오히려 해당 지역에 있던 마을이 피해를 입었음이 밝혀졌다. 면장은 마을의 희생자를 131명이라고 파악했으며, 또한 당시 피해를 입었던 한 사람은 해당 지역에 3-400명의 피란민이 운집해 있었다고 증언했다.*
*김태우, 『폭격-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창비, 2013, 231-236p
한국전쟁에서 미 공군은 네이팜탄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네이팜탄은 은신처로 사용될 수도 있는 마을을 파괴하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군사적 관점에서 적의 은신처 파괴는 마을 주민들의 피해보다 우선시되었다.
‘부수적 피해’는 없다
‘부수적 피해’란 군사작전 중 작전상의 실수 등으로 부득이하게 발생한 피해를 뜻하는 군사용어다. 통신상의 오류, 조종사의 오판으로 인한 오폭 등이 이에 속한다. 하지만 폭격 작전은 그 모든 피해의 발생 가능성을 충분히 고려하면서도, 군사적 목적으로 인해 감행된다.
폭격의 본질은 모든 폭격의 목표물을 적으로 취급하는 것이고, 적은 파괴와 살상의 대상일 뿐이다. 도시와 마을, 거기 살고 있는 사람에 대한 폭격은 결코 실수가 아니었다. 작전의 명백한 의도였다.
폭격이 입힌 인명 살상과 초토화 같은, 거의 돌이킬 수 없는 피해에 ‘부수적 피해’란 용어를 붙일 수는 없다.
뒤편의 집은 불타고 있다. 한 노인에게 무장한 해병대원들이 길을 묻고 있다.
1950년 9월 10일, 인천상륙작전의 사전 작전으로 미 해병대 전투기들이 월미도에 집중폭격을 가했다. 폭격의 목표에는 월미도 동쪽에 위치해 있던 민간인 거주지도 포함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폭격으로 월미도 주민 100여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밝혀졌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보고서에 따르면, 폭격은 2개 편대의 총 세 차례 출동으로 진행되었다.
이 문서는 당시 작전보고서 중 하나이다. 1950년 9월 10일 미 해병대 전투기 대대 VMF-214 소속 F4U-4B 전투기 8대로 이뤄진 편대가 작전을 진행했다.
전투기 1대 당 2개의 네이팜탄(NP), 총 16개의 네이팜탄과 약 3,000발의 탄약(AMMUNITION)을 장착한 상태에서, 2채의 창고와 숲이 있는 지역, 수많은 작은 건물들을 불태웠다고 보고(DAMAGE TO TARGETS: 2 warehouses-wooded area burning, numerous small buildings) 하고 있다.
“이번 비행은 할당된 목표들에 기총소사를 가하고, 목표물을 태웠다. 네이팜탄은 2분의 1만 폭격했으나, 기총소사와 다른 화염에 의해 불이 붙었다. 이번 비행은 편대 지휘관인 리쉬드(LISHEID) 중령이 지휘했다.”
사진 상의 지역은 흥해읍 흥안리 지역, 곡강천이 동해와 만나는 곳으로 추정된다. 진실화해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흥안리 지역에는 1950년 8월 16일에 폭격이 있었다. 사망이 확인된 사람은 18명이며 이를 포함해 최소 100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파악된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접수된 포항의 폭격 피해 지역은
포항 흥해읍 용한리•칠포리•남송리•북송리•흥안리, 신광면 마북리, 청하면 이가리•월포리•유계리, 연일읍 유강리, 죽장면 광천리, 송라면 방석리, 송도해변 등이다.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
하늘에서 내려다본 도시나 마을의 모습에선 사람이 살아가는 생생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폭격기 조종사에게 건물이 무너지는 굉음과 사람들이 지르는 비명은 들리지 않는다. 전쟁지도실에 펼쳐진 거대한 지도를 보며 폭격 명령을 내린 사람들의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폭격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 폭격으로 쑥대밭이 된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 거기서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폭격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한국전쟁 당시 폭격이 있었던 것으로 강력히 추정되는 곳들을 표시해놓은 지도다.
▶ 빨간색: 미군이 폭격한 북한의 주요 도시
▶ 초록색: 진실화해위에서 폭격 피해를 규명한 지역
▶ 파란색: 피해 규모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폭격 사실이 확인된 지역
▶ 우측 상단 표: 미군이 평가한 북한 주요 도시의 파괴 정도
지도 양옆으로 적힌 피해자 수는 신원이 확인된 사람만을 뜻하며, 실제로는 훨씬 많을 것으로 강력하게 추정된다.
또한 지도 상으로는 북한 지역보다 남한 지역이 더 폭격을 많이 당한 것으로 보이나, 사실상 북한 지역은 전역이 폭격의 화마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