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4일, 5일, 그리고 6일, 대전 인근의 감옥과 강제수용소에서 온 모든 죄수들이 트럭이 실려 계곡으로 왔다. 철사로 묶여 의식을 잃고, 함께 정어리처럼 쌓인 채로.”*
*앨런 위닝턴(Alan winnington),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 데일리 워커(Daily Worker), 1950, 5p
비석의 상단에는 ‘대전형무소 정치범 및 민간인 집단1학살지’라고 적혀 있다. 비석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곳 골령골(대전시 동구 낭월동)은 1950년 7월 초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제주4.3 및 여순사건 관련자 등 정치범과 대전·충남지역 인근 민간인들이 (한국)군인과 경찰에 의해 끌려와 집단 처형돼 묻힌 비극의 현장이다.
1999년 12월 말 해제된 미국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으며 이 문서에는 50년 7월 초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정치험 1천800여 명이 3일 동안 집단총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과정에서 정치범 외에 민간인이 열흘 가까이 끌려와 총살됐으며 희생자 수도 최소 3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50주년 7월 3일-
대전형무소 산내학살진상규명위원회”
앨런 위닝턴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한국에 급파되었고, 7월에 대전을 방문했다. 그는 이 팜플렛에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좌익 정치범과 인근의 주민 7000여 명이 한국 군인과 경찰에 의해 학살된 후 암매장되었다고 보도했다.
사진 최상단의 Rangwul death Valley는 현재의 대전 동구 낭월동(골령골)을 뜻한다. (이하는 표시된 부분의 번역) “7월 4일, 5일, 그리고 6일, 대전 인근의 감옥과 강제수용소에서 온 모든 죄수들이 트럭이 실려 계곡으로 왔다. 철사로 묶여 의식을 잃고, 함께 정어리처럼 쌓인 채로.”
구덩이에서 죽다
1950년 6월 28일, 전쟁이 발발한 지 사흘 되던 날에 군인과 경찰이 대전 골령골로 사람들을 끌고 왔다. 끌려온 사람들은 대전 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수감자들이었다.
국민보도연맹은 국가가 좌익을 전향시키기 위해 만든 단체였다. 초기에는 가입하면 안전을 보장한다는 약속에 많은 사람들이 가입했다. 조직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좌익과 관련이 없는 사람도 식량을 준다는 말 등에 가입하거나 혹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가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들 모두가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제주4.3과 여순사건 등으로 잡혀 온 정치범들이 많았다. 대부분 제대로 된 재판도 받지 못하고 무고하게 끌려온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좌익사범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에는 긴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사람들은 구덩이에서 죽었다. 학살은 퇴각 직전인 7월 17일까지 계속되었다.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 이라는 제목의 이 문서는 주한 미대사관 육군무관인 에드워즈 중령이 산내 골령골 학살에 대해 1950년 9월 23일 워싱턴의 미 육군 정보부에 보고한 문서다.
좌측 상단에 적힌’EVALUATION A-1′ 은 문서의 등급을 뜻한다. A~F는 정보의 타당성을, 1~6은 정보의 가치를 나타낸다. 이 문서의 등급인 A-1은 최고로 신뢰할 만한 정보라는 뜻이다.
“서울이 북한에 의해 함락되었을 당시 형무소에서는 수천 명의 재소자들이 풀려난 것으로 보고되었다. 서울이 함락되고 난 후, 형무소의 재소자들이 적군에 의해 석방될 가능성을 방지하고자 수천 명의 정치범을 몇 주 동안 처형한 것으로 우리는 믿고 있다. 학살이 전방 지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닌 점을 볼 때, 이러한 처형명령은 의심의 여지 없이 최고위층(top level)에서 내려온 것이다.
…
대전에서의 1,800여 명의 정치범 집단 학살은 3일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1950년 7월 첫째 주에 자행되었다.”
거대한 구덩이는 학살 며칠 전 주민들이 동원되어 파놓은 것으로, 길게는 200m까지 되는 구덩이도 있었다고 한다. 학살지의 전체 길이가 약 1km에 달하기에 골령골 학살지는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두 번 학살당하다
1950년 7월 21일, 북한이 대전을 점령했다. 북한군은 조국반역죄와 민족반역죄라는 죄목으로 우익 인사나 경찰, 지주 등을 잡아들였다. 보도연맹원도 전향한 배신자라는 이유로 끌려갔다. 그들은 대전형무소와 경찰서, 프란치스코 회관 등에 나뉘어서 수감되었다. 비슷한 시기 대전뿐 아니라 북한이 점령한 지역 중 많은 곳에서 유사한 일들이 일어났다.
9월 중순,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한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을 시작했다. 퇴각 직전, 북한군은 잡아들인 사람들을 학살했다.
정동은 대전시 정동을 뜻한다.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원이나 동회 간부, 경찰 관계자 등은 모두 반동분자로,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사람들은 월남자로 명명되었다. 남한을 점령한 북한은 이들을 범죄자로 간주해 검거하고 처벌했다. 이들의 죄목은 ‘조국반역죄’, ‘민족반역죄’였다.
미군이 북한군의 대전 학살 현장을 촬영한 영상
NARA 소장, 전갑생 제공
국민이 되지 못한 사람들
전쟁은 모든 사람을 ‘적’ 아니면 ‘우리’로 나눴다. ‘적’과 ‘우리’를 판단하는 권력은 오직 국가에만 있었다. 국가가 적이라고 판단한 민간인들은 모두 학살당했다. 그렇게 국가는 ‘국민’을 구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