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를 얼매나 맞았든지, 집 가서 엉금엉금 기어가다시피 해가지고. 한 열흘 간 집에 드러누워 있었어. 그니까 피난 안 갔다 하는 게 죄다. 너도 여기에 가담했었잖아. 이렇게 되는 거야. … 그 당시만 해도 피난 안 갔다 온 사람은 이등국민이야. 피난 갔다 온 사람은 일등국민이라고 했고.”
*송규섭 구술, <피난 갔으면 1등 국민, 피난 가지 않았으면 2등 국민>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녹취
“도시에 남아있던 미국인들은 이 늦은 시간에도 민간인과 군대가 불안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6월 28일 새벽 1시,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장군은 자신의 참모진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예정에 없이 서울을 떠났다. 서둘러 도시를 떠난 채병덕 장군은 남쪽의 한강인도교를 건넜다.
이 다리는 1,000명이 넘는 피란민과 군인들로 가득했다. 다리에는 최근 며칠 동안 철거를 위해 철사로 연결된 엄청난 양의 폭발물이 다리의 전체 길이만큼 설치되어 있었다. 수천 명의 한국군과 민간인들이 다리를 통해 탈출하고, 도시가 확실히 적에게 함락되고서야 도시의 마지막 탈출 수단(한강인도교)이 파괴될 예정이었다.
매우 의심스럽게도 채병덕 장군이 다리를 건너는 것과 동시에 이 혼잡한 구조물은 사람들과 짐차와 함께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거기 있던 사람들에 의하면, 600명에서 800명 사이의 남한 사람들이 한강인도교의 파괴로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된다.”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던 대부분은 북한에 협력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부역혐의 학살은 북한의 점령을 겪은 거의 모든 지역에서 발생했다. 점령 당시 북한 인민위원회에서 간부 역할을 했던 사람뿐 아니라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소한 것으로 협력했던 사람들도 모두 부역혐의를 받았다. 대부분의 학살은 적법한 절차 없이 일어났다. 학살의 가해 세력에는 군인이나 경찰 등 공권력뿐 아니라 반공청년단 등 사설 치안대도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