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자2

“이 양반은 이 안에 있는 것은 다 적이다. 광주에 포로수용소를 지었어요. 그래가지고 공격 개시하면 아이들, 부녀자들을 다 적을 만들고 포로로 데려 오는데, 트럭에 싣고 광주까지 후송하면 다 얼어죽을 것입니다.”

*백야사 토벌작전 당시 참모였던 공국진의 증언 중, 《미디어오늘》, 2011년 6월 29일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잡혀 와 심문을 기다리며 경찰이 준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
1951.12.1. NARA 소장

“남원에는 임시수용소가 있었고 광주에 진짜 수용소가 있었는데 그 이름은 중앙포로수용소였지만 사실상 ‘반란자 수용소’였다. … 당시 출신에 관계 없이 모든 빨치산들은 ‘공비’로 분류됐으며 대개 국방경비대 법상 이적행위 혐의로 기소됐었다.”

*백선엽, 『실록 지리산』, 103p, 고려원, 1992

빨치산 혐의를 갖는 전쟁포로가 국군 작전사령부로 추가 처리와 취조를 위해 이송되기 전, 국군 수도사단 사령부에게 절차를 밟는 모습
1951.12.10. NARA 소장

빨치산 혐의로 국군 수도사단 관할 수용소에 수감된, 발에 동상을 입은 여성 포로
1951.12.10. NARA 소장

국군 수도사단 임시 수용소에서 빨치산 혐의로 잡혀 온 포로들이 사후 처리를 위해 대기하는 모습
1951.12.10. NARA 소장

“백야사 작전으로 말하면 포위권을 형성할때까지가 일단계 작전이고 그 다음에 지리산을 양분해서 양 사단이 하는데 지리산이 4개 도 9개 군입니다. 9개 군 주민이 20만입니다. 이 양반은 이 안에 있는 것은 다 적이다. 광주에 포로수용소를 지었어요. 그래가지고 공격 개시하면 아이들, 부녀자들을 다 적을 만들고 포로로 데려 오는데, 트럭에 싣고 광주까지 후송하면 다 얼어죽을 것입니다. 국내전에서 동족상잔을 하고 있는데 다소 양민과 적을 가려 취급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이북 땅에 가서 8로군 토벌하는 것과 다름이 있느냐 했습니다……그 엄동설한에 우리가 파카 입고 히터 틀어도 추운데 수많은 양민들이 광주에 가다가 반 수 이상 죽었어요.”
*백야사 토벌작전 당시 참모였던 공국진의 증언, 《미디어오늘》, 2011년 6월 29일